이런 날들도 있어야지.
by 아암
도시와 도시.
김윤아를 닮았던, 성장이 빠른 친구가 있었다. 또래에 비해 이르게 찾아온 사춘기는 자의식의 과잉을 불렀고, 그 아이에게 동갑내기 친구들이란 대개 덜 자란 동생으로 보였다. 몇 년후 내 자신을 사춘기가 침략했을 때 다시 만난 친구는 여전히 "자의식 과잉의 조숙한 초등학생"의 옷을 다 벗어버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독특하고 멋져보이기 위해 데스메탈을 들었고, 대학생 남자친구와의 연애 진전상황에 대해 무심한 듯 감질나게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친구의 이름을 부를 땐 성과 이름을 붙여 꼭 풀네임으로 불렀고, 수학을 죽도록 싫어하는 주제에 "이과의 여자라니 멋지지 아니한가"라며 소수 이과반에 들어갔다. 이 모든 것이 너무도 해맑고 천진해서, 나는 그 애를 좋아했다. 하얗고 예쁜 말라깽이의 교복입은 소녀라니, 그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조잘거리고 있는 것을 보자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몇 년 후 만난 친구는 공대 아름이의 아우라를 뿜는 대학생활을 거쳐 대기업의 사원이 되어 있었다. 정릉에서 서울역까지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천안까지 간 후 통근버스를 타고 회사에 갔다가 역순으로 집에 돌아온다고 했다. 택시에서 졸고, 기차에서 졸고, 통근버스에서 숙면을 취하므로 수면은 그닥 부족하지 않아, 하지만 묘하게 피곤해서 외출은 하지 않고 덕분에 돈을 쓸 데가 없어, 라는 슬픈 근황을 전해 주었다. 그 예쁘던 아이는 통근과 일에 찌든 희미한 눈빛의 보통 여성이 되어 있었다. 하이고, 처음으로 친구가 그닥 부럽지 않았다. 나는 돈도 없고 번쩍거리는 회사에 다니지도 않으며 평범해진 그아이보다도 예쁘지 않았지만, 적어도 간헐적으로 눈을 빛낼 수는 있었다. 그런 여유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2월, 친구는 회사를 때려치고, 장녀의 부담감도 때려치고, "도대체 시집은!"을 울부짖는 엄마를 뒤로 하고 세계 일주를 떠났다. 수시로 바뀌는 프로필 사진과 문구에는 도착하는 도시의 이름과 사진이 걸려 있다. 맙소사 다채롭기도 하지, 반년 넘게 세계를 떠돌며 수십개 도시의 땅을 밟고 있다. "돈 쓸데도 없다"는 친구의 자조가 떠올라 웃음이 난다. 이녀석, 돈쓸데를 제대로 찾아냈구나. 지금은 과테말라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다. 귀여운 연두색 트럭 사진을 보니, 아아 친구야 널 알고 지냈던 이십년 중 지금이 가장 네가 부럽다.

같은 2월, 나는 서울을 떠나 이 도시로 이사왔다. 쿨하게 도시에서 도시로 떠도는 친구와 달리 나는 집을 구해 세를 얻고, 가구를 사들이고,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식물이란 정착의 꼬깔콘 아니 아이콘이 아니던가, 우리는 놀랍도록 이 도시에 만족하며 정들고 있다. 새로운 도시에 정착해 식물을 키우는 것은 가방 두어개 들쳐메고 도시를 여행하는 것에 비한다면 확연히 모양빠지는 일이겠지만, 나는 포기가 빠른 인간. 게다가 좋은 도시인 것만은 확실하다.

비밀 하나 - 그닥 서울로 돌아가서 살고 싶지 않다.



접음
by 아암 | 2011/09/28 21:14 | 트랙백 | 덧글(0)
잠못드는밤 비는 그쳤다만 아니 밤도 아니구나
본래 내가 예민한 인간인가, 아니다. 잠자리가 바뀌었다는 우아한 이유로 조금 뒤척일 수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렇게 날밤을 꼴딱 새운단 건.. 정상은 아니다. 지금은 오전 6시 43분, 남자는 이따금 뒤척이며 조금이라도 자뒀는지 묻는다. 미안하다, 잠이 오질 않는다.
미처 소모하지 못한 칼로리가 몸을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충분히 피곤한데다 지난밤 마셨던 알콜의 냄새가 날숨에 섞여 나오고 있다. 딱 숙면하기 좋은 몸상태다. 아마도 평소였다면 죽은듯 잠자다 아침에 물 한사발을 들이키고 다시 누웠을거다. 운이 좋다면 바나나를 생산했을 수도 있다.
괴롭다. 약간의 취기는 잠들지 못해 뒤척거리던 여섯시간 전과 거의 동일한 상태로 남아있고, 눈은 점점 뻑뻑해지며 반지가 살을 파고드는 걸 보니 손가락도 부어오르는 모양이다.
십대에 원인모를 불면과 가위눌림에 시달린 적이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물론 전혀 좋아지지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무언가가 보였고 그 무언가는 수면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평화로워야 할 십대소녀의 정신을 파먹었다. 엄마는 나의 신앙심이 부족한 거라고, 좀더 진정성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명령했지만 극강의 절실한 기도 따위는 먹힐 리가 없었고 나의 호소역시 엄마에게 먹힐리가 없었다. 밤마다 잠을 설치고, 학교 책상에 엎어져 쪽잠을 자다 가위에 눌려 내리 두시간을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방해없이 잘 수만 있다면 수명 십년쯤은 아낌없이 떼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의 원래 제목은 '아무도 잠들지 않는다.' 투란도트의 성실한 불면의 결과다. 내가 아무리 뒤척여봐야 나의 불면을 설명하는 아리아가 들려올 리가 없다. 잠들고 싶다, 한시간이라도 자고싶다.

참고로, 십대의 나를 괴롭혔던 불면과 가위눌림 패키지는 어느날 그냥 사라져 버렸다. 물론 엄마는 열심히 기도한 탓이라고 진심으로 믿고있을 것이다. 나는귀신보다 이 사실이 더 무섭다, 아니 제일 무섭다.
by 아암 | 2011/08/04 07:10 | 트랙백 | 덧글(0)
주부의 아침. 주의: 둘만의 소소한 일상에 대해 물어본 사람 없음을 알고 있음
6시 20분쯤 기신기신 침대에서 기어나온다. 알람은 5분 간격으로 울려대지만 같이 사는 남자는 물론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이뻥의 기본 알람 기능은 만져주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으므로, 내가 간간히 안방으로 달려가 알람을 끄지 않으면 남자는 20여분간 울려대는 두 폰의 알람 돌림노래를 들으며 잘도 잔다. 니 귀는 음소거 기능이 있는 모양이구나..라고 차마 말은 할수 없다.

아침밥 먹는 습관이 없는 남자는 밥을 먹느니 오분을 더 자겠노라고 애원했지만, 밥을 먹지 않으면 출근할수 없을 것이야, 라는 부인의 엄포에 꼬리를 내린지 오래다. 밥, 죽, 빵, 씨리얼 등등을 로테이션 해준다. 오늘은 씨리얼을 얹어 같이 구운 프렌치토스트. 냉동고에서 식빵 두장을 꺼내 토스터에 2분가량 돌려놓고 그동안 달걀 하나에 우유, 설탕을 소량 넣고 저어둔다. 해동된 식빵을 두동강 내 달걀물을 입힌 후 약한 불에 올리고, 그 위에 씨리얼을 뿌린다. 달걀물이 남을 경우 씨리얼 위에 뿌려주어 점착이 잘 되라고 매만져준다. 오늘은 양상추가 똑 떨어져 샐러드는 생략. 이쯤되면 남자를 깨울 때가 됐다. 남자의 엉덩이를 찰지게 때리고 안경을 얼굴에 얹어주면 남자는 엉금엉금 기어 마루 쿠션에 드러눕는다. 입에 음식을 떠넣어주며 뉴스를 함께 본다. 아시겠지만 뉴스를  보며 흐뭇해할 수 없는 세상, 아침부터 욕지거리 서너마디를 해야 식사가 끝난다는 사실이 슬프다.

남자는 식후 구름과자를 먹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남자가 똥때리고 샤워하는 동안, 주부는 식기를 싱크대에 던져넣고 남자가 입을 옷을 꺼내놓는 것도 모자라 바지에 벨트까지 끼워놓지만, 이따금 정신을 놓고 벨트를 뒤집어 끼워 놓는다던지 하는 깜짝 이벤트도 잊지 않는다. 이게 다 너의 치매 예방을 위해서란다. 정말이야.

남자가 물을 뚝뚝 흘리며 기어나온다. 그냥 두면 오늘도 맨얼굴로 겨나갈 것이므로 얼굴에 로션을 발라주고 머리를 말려준다. 그동안 남자는 눈을 반쯤 감은채 양말을 신고 옷을 입는다. 냉장고에서 토마토와 설탕시럽을 꺼내 물과 함께 갈아서 megamen이라는 엄청난 이름의 비타민과 간때문이라는 그 알약을 먹인다. 음료를 좋아하는 남자는 목구멍을 열고 토마토 주스를 원샷. 여름이 좋은건 싼값의 토마토를 어디서든 팔기 때문이 아닐까.

이놈의 도라에몽같은 남자는 바지와 겉옷 주머니에 담배, 라이터, 차열쇠, 안경수건, 전화기, 펜 등등을 한없이 쑤셔넣고는(그러니 주머니가 찢어지지 이양반아) 집을 나선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가 손을 흔들어 주고 다시 집에 들어온다.

여기까지가 기상 후 한시간. 언젠가 짱구 극장판 초반부에서 봤던 짱구엄마가 생각나기도 한다. 자전거로 유치원 아니 회사에 데려다주지만 않을 뿐이지, 다른게 뭐얏!

친구의 애인이 친구에게 "내가 쉰내 나고 암내 나도 사랑해야돼"라고 했다길래 "결혼하거라 쉰내 암내라니,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야"라고 말해주었다. 아직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해 일말의 환상을 품고 있을 친구에게 다큐적 현실을 말해주는 것은 쇼크라고 판단해 자세한 것은 말해주지 않았다. 발에서 똥내나!라고 채찍으로 때리거나, 어머 자기 발 닦으면 여기서 얼마나 더 이쁠까!라고 당근을 먹여야 하는 남자도 있다고, 그래서 오늘은 집에 오자마자 벗은 양말을 '왼손은 거들뿐'이라며 바구니에 투척(그나마도 실패해서 모양빠지게 손으로 주워야 했다)하고는 '내 특별히 자발적으로 발을 닦아주지'라며 의기양양하게 화장실로 들어가는 남자의 엉덩이를 기특하다는 듯 두드려주며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는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상이 꽤 괜찮다는 것은, 아마 몇번 말한 것도 같다.

by 아암 | 2011/06/28 22:52 | 트랙백 | 덧글(1)
사실 나도 아이뽕 유저

쿼티자판에 낚이고 결혼전 소비홍수로 인한 무감각,  그리고 봄바람의 영향으로 질러버렸던 안드로원은 그야말로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우리도 한번 스마트해져보자, 하고 똘똘이전화기를 구매했지만 이건 스마트폰이 아니라 앵그리폰 혹은 템퍼 폰이라 해야하나.. 기본적인 어플 하나 제대로 설치/실행되는 것이 드물었다(카톡조차 사용할수 없었음). 혹시나,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떨리는 가슴으로 OS를 업그레이드 해보았지만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 문자 한통 보내는 데 3분이 걸렸다. 그러나 어쩔것인가, 2년간의 노예계약으로 인해, 폰을 갈아탄다면 둘이 합쳐 수십만원의 위자료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뭐, 위자료 아까워서 일년을 참았다간 홧병으로 죽어버릴 것 같아서 질러버렸다 아이뽕. "난 흰둥이 나오면 지를거얌"이라고 노래를 불러왔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구매 3개월 후 흰둥이가 출시되자 만나는 친구마다 "아이폰 화이트.. 풋"하며 날 비웃어댔다. 하아.. 난 소비랑은 인연이 없나봐.

잘 살고 있다. 스머프마을을 가꾸고, trade nation을 유지하고, 꽃을 키운다. 스머프는 귀엽고, trade nation은 같이 사는 남자가 너무 열심히 하며, flower garden은 물주는 소리가 너무 좋아서 지울수가 없다. 나들이할 때 runkeeper와 세 종류의 지도를 보며 즐거운 뚜벅이 생활을 영위한다. 가방이 무거울 땐 책을 아예 들고 나가지 않는 날도 꽤 된다. 로모는 서브 카메라 직위해제를 당했다. 탈옥의 유혹도 크지만, 카테고리 정리와 테마디자인이 골치아파 손대지 못하고 있다.

앞머리를 방치중이다. 옆으로 갈라 붙이자니 댕기동자, 끌어올려 묶자니 참수당할 왜구, 바람에 흩날리게 두자니 미친년..... 이거 어쩜좋다니.


사진방출-접을거임
by 아암 | 2011/06/08 16:51 | 트랙백 | 덧글(3)
전핀인거 알아요

TGIF를 부르짖던 노예생활을 청산한지 아직 일년이 되지 않았건만 아침마다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구겨넣어 사무실까지 열번쯤 쌍욕을 삼키던 출근길은 이미 아득하다. 사무실이란 데 내 자리가 있고, 치워도 치워도 더럽던 책상이나, 지원팀에선 "니컴퓨터 사양이 회사에선 상위급에 속한다"더니 뻑하면 다운되고 포맷해야했던 회사 컴퓨터도, 책상 밑에 서너 켤레 굴러다니던 운동화랑 슬리퍼, 뭐 이따위 그림은 당장에라도 완전 디테일하게 그릴 수 있을 듯 또렷하긴 하다. 업무에 필요하대도 안사줘서 역시 쌍욕을 스무번씩 삼키며 내돈으로 샀던 RW는 관리팀의 샤방한 총각이 컴퓨터에 조립해주며 "나중에 퇴사할 때 떼줄테니 꼭 가져가라"고 했었는데 이 색히가 먼저 튀고 말았다. 그걸 떼왔어야 되는데!!!  .. 이러고 있다.

퇴사를 앞두고 한 2주일간 짐을 날랐다. 하루는 쿠션이랑 실내용 겉옷들, 그담날은 신발, 그담 삼사일 나눠서 책, 그담날 펜이랑 문구류... 신혼집이 회사랑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마지막 삼사일은 유니섹스 브랜드의 엠디 오빠야가 챙겨준 남자 옷들을 날라댔다. 셔츠나 뭐 이런건 같이 사는 남자의 몸에 잘 맞았지만 외투류는 너무 커서, 술마시러 놀러온 남자사람들에게 인심쓰며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그동안의 업무내용이나 프로젝트들의 파일은 외장하드를 사야하는데...데.. 하다가 홀랑 놓고 와버렸다. 중요한 건 몇개 어디다 담아왔던 것 같은데, 도무지 찾을 방법이 없다. 샘플로 쓰고 남은 원단들을 좀 가져왔어야 하건만, 역시 정신이 없어서 그냥 다 버리고 왔다. 청소하시는 이모야들이 아주 기뻐라 하시며 가져가셨는데, 아깝다. 어디서 살 수도 없는 원단도 많았는데.

이딸리아의 법인장 누님은 나더러 자기 밑에 와서 일하라고 숫자까지 제시하셨는데, 뭐 이건 있어보이려고 주변에 고민인척 털어놓는 거 말고는 아무 의미 없는 오퍼였다. 나 잉여 백수지만 찾는데도 있다규, 라는 절규랄까. 사실 오퍼가 옛날부터 간간히 있어왔지만, 그 법인장 누님은 열정과 사이코 사이의 어디에선가 헤매고 계신 분이므로(심지어 사이코 쪽으로 좀더 기운다) 내가 가서 호구가 되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다. 가장 큰 고민은 고양이를 들이고 싶은데 탁묘부터 해봐야 하나, 라는 것이고 두번째 고민은 집주인이 새로 맞춰줬다는 싱크대 하수관의 은근한 악취, 뭐 이정도다. 저런 차도냥 말고 개냥이를 한녀석 들이고 싶은데 말이다. 같이 사는 남자가 우리집은 15층이라 애가 뛰쳐나가면 어쩔거냐며 반대중이다. 그러게 말이다.





by 아암 | 2011/04/22 20:23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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